오늘, 다벨을 떠났다. 떠나기 하루 전날, 전체 모임 자리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몸이 아플만큼 밀려오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싶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지금, 남은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내 생애 없었던 강렬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의 삶에 대해 여기에는 쓰지 않을 것이다.

그 곳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쓴 글을 통해서 공동체를  접하는 것보다

직접와서 보고 경험하기를 바라셨다. 나는 이제 내게는 그리운, 그 분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다.

그러나, 단 하나, 내가 보고 듣고 나눈 그 곳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이 것만은 살짝 여기에 속삭이고 싶다. 그 분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며.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이 문장을 만났을때 내 마음은 멈추었다.

 

‘To treat others merely as the means to an economic end is a sin.’

‘사람들을 경제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만 대하는 것은 죄이다.’

 

마이어씨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저녁 식사시간에 나는 할아버지에게 여쭈어보았다.

 

“나는 이제 사악함으로 가득한 바깥 세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악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약한 존재입니다.”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 하셨다.

 

 

“No, you are not.

 

-얘야, 아니다. 너는 약한 존재가 아니란다.

 

가서 너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거라."

 

 

 

 

식사가 끝나고 가족들이 테이블을 치울 때, 마이어씨는 우리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와 소파에 앉아

더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두 분은 공동체 안에서 만나 결혼하신 건가요?”

 

“그렇단다. 영국에서 파라과이로 떠나는 배를 탔을때 나는 세 살 반이었고, 할머니는 한 살 반이었어.

우리는 그때 같은 배 안에 있었단다. 우리 공동체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는데, 영국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고,

2차 대전이 일어나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하자 영국인과 독일인이 섞여지내던 우리 공동체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어.

우리는 새로 살 곳을 찾아야만 했단다. 그 당시에 전쟁을 하고 있는 영국인과 독일인을 함께 받아주는 나라는

이 세상에 딱 한 나라, 파라과이 밖에 없었단다. 우린 다른 나라들에도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지.

그래서 우리는 파라과이로 가게 되었어. 거기서 농사를 지어본적도 별도 없던 사무직 일을 주로 해오던 사람들이,

8000에어커(?)의 땅을 사서 나무로 가득한 그 땅을 농사 짓는 곳으로 만들기 시작했단다.

그때는 기계도 없어서 손으로 다 일을 했는데 그 많은 나무를 베고 쓰러뜨리고 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을 했어.

우리는 정글을 농장으로 만들었던 것이지.

 

파라과이는 호주랑 기후가 비슷한데 열대지역도 있단다.

이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렴. 저게 바로 우리가 자랐던 파라과이 풍경이야.”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에 따라 살지 않았던 때도 있었어. 그렇지만 한번도 이 길을 선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열여섯살 때 나는 공동체를 떠났어. 공동체 밖으로 나가 그 곳 주민들이 쓰는 인디언 말을 배웠단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한국말이 그 때 내가 배웠던 인디언들의 말이랑 아주 비슷하게 들리는 구나.”

 

 

 

 

영국 남부에 위치한,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개인 재산을 포기하고 단순, 소박한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다벨 공동체.

 

http://www.bruderhof.com/en

 

 

이 곳에서의 일주일이 지나갔다. 이 곳의 노동강도는 쎘다. 그러나, 매일 아침 3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던 그 부엌, 그리울 것이다. 그 부엌 창밖으로 보이던 막 봄이 오고 있던 영국의 풍경이랑, 숙소에서 부엌에 가던 길에 피어나던 보라색 겨울 아이리스랑, 하얀색 스노우 드롭이랑, 숙소 창밖으로 보이던 녹색으로 반짝반짝 거리는 잎과 빨간 열매를 달고 있던 할리 나무랑, 어떤 날 아침에는 안개가 끼어 정오가 되어서야 걷히고, 어떤 날 밤은 날이 하도 맑아서 오리온 자리에서 빛나는 별이 그렇게 크고 밝을 수가 없었던, 그 사람들이 살던 그 마을, 그리울 것이다.

 

Posted by 혜선, :

오늘, 설 연휴가 끝난 오후,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중학교때 친구 선영이가 나왔습니다.

난 선영이에게, '선영아, 나 이러이러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너무 걱정이 되어.'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영이는, '그러게. 어떡하니.' 하고 함께 걱정해 주었습니다.

꿈에서 깨었을 때 나는 선영이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영이는 지금 멀리 있습니다.

한번 선영이가 보고 싶기 시작하자, 그리고 그 친구가 먼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자,

나는 살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그립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대구에서 살았고 서울에서 살았고 거창에서 살았고 그리고 또 지금은 다른 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다른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만났던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고

나는 그들을 1년도 한번도 만나기 쉽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자 곧, 내가 가본 지구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방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자리나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그녀의 집 사진을 올린다면, 어쩌면 그녀가 기분이 언짢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자리나의 집에 초대받지 않은 내 친구인 여러분은 기념 셀카를 찍고 있는 2011년 10월 29일의 내 등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집 거실을 엿보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바닥이 푹신푹신한 그 거실에 들어가서 한쪽 벽면 가득히 걸려있는 오래된 가족 사진들을 본 순간,

'와우, 이건 패밀리 뮤지엄이에요.'하고 말했습니다. 자리나는 내가 2001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만났던 인도 출신의 미국인 심리치료사입니다. 그녀는 아마 올해 우리 엄마 나이쯤 되었을 겁니다. 나는 오클랜드에 있는 아시아계 이민자 여성들과 난민들을 지원하는 센터에서 몇달간 자원활동을 했고, 그때 그녀는 그 센터의 상근자였습니다. 10년만에 우리는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내게 'I can't believe you are here'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0년전에 일어난 아주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도 모두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10년동안 이 여행을 준비했고, 드디어 다시 그녀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음이 틀림없었지만 그러나 가슴 아픈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집을 둘러보고 정원에서 꽃을 보고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가고 그러고나서 남은 나의 여행 계획을 얘기하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다시 나를 시내의 게스트하우스로 데려다주었습니다. 자리나는 내게 'Don't make another 10 year'라고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들르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바로 뉴질랜드의 남쪽을 향해서 여행을 떠났고 로토루아를 지나, 웰링턴에서 배를 타고 남섬으로 갔습니다. 나는 남섬에서 꿈에 그러던 프란츠 조셉 빙하에도 가고 마운트 쿡에도 갔습니다. 마운트 쿡에서는 마운트 쿡 릴리가 그려진 엽서를 자리나에게 보냈습니다. 한달 후 뉴질랜드를 떠나던 마지막날, 그들은 내게 케이로드에 있는 인디언 채식 식당에서 밥을 사주었습니다. 나는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한 번 와보니 여기 오는게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구요.

오클랜드를 떠나던 마지막날 밤, 나는 목적지 없이 도심 순환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의 한 귀퉁이에 앉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도도시의 거리거리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밤, 그 버스안에서 나는 그 도시가 나의 일부임을 느꼈습니다.








다시, 자리나의 방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집에 들어가기전 자리나는 내게 'We lifted our house'라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집을 들어올렸다니요.

그러나 거실 앞 벽면에 붙은 저 사진을 본 순간 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자리나의 집은 원래 1층짜리 단독 주택이었는데, 1층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여 2층으로 밀어올리고

새로운 1층을 만들었다는 거였습니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새로 생긴 1층에 거실과 침실, 화장실을 새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새로 생긴 1층에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 '패밀리 뮤지엄'이 있습니다.





2011년 10월 29일 방문당시, 그 패밀리 뮤지엄은 아직 세팅중이었습니다.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액자 하나를 살짝 소개합니다. 저 네 장의 흑백사진은 아마도 4~50년에 걸친 세월의 흐름을 담고 있지 싶습니다. 첫 번째 사진 속엔 어린 자리나와 그녀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젊은 부모님이 함께 있습니다. 마지막 사진에서는 그 아이들이 훌쩍 자라서 중년이 되었고, 어머니는 파파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저 거실의 한쪽 벽은 저런 사진들로 꽉 차 있습니다. 자리나는 사진을 하나 하나 가리키며 이게 언제이고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이 언니는 자라서 승무원이 되었고, 지금은 미국 엘에이에 살고 있어. 다음주면 그 언니의 아들이 너처럼 뉴질랜드로 여행을 올겨야. 이 동생은 지금 이탈리아에 살고 있어. 이 녀석은 어렸을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 우리 아들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아르헨티나에서 온 여자와 결혼했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바로 인도로 갈 수가 없었어. 미국 시민권을 가진 내가 바로 인도로 들어가려면 대사관에서 가서 무슨 절차가 필요했는데, 뉴질랜드 미국 대사관은 웰링턴에 있었어. 래리(남편)가 그날 밤새도록 7시간을 운전해서 웰링턴에 갔어. 아침에 비자를 받아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와 인도로 가는 비행기를 탔어.'


이쯤되면 내가, 떨어져 사는 많은 친구들이 그립기 시작했을때, 왜 이 방이 생각났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lift된 그녀의 집 2층에는 또 특별한 방이 있습니다.

2층에 올라가자 그녀가 어떤 방을 또 한참 뒤집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내가 보냈던 편지와 카드와 소포를 꺼냅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전 세계에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낸 편지를 모아두는 방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내가 보냈는지 기억조차 잊어버린 소포의 색깔도 기억했습니다.

'내가 이런 걸 보냈단 말이죠? 흠.'









집안의 구석구석엔 숨겨진 보물 같은 장소가 있습니다.











멀리엔 바다도 보입니다.






래리가 정원을 손질합니다.

정원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도 없습니다.






이 녀석은 '보틀 브러쉬'라고 불리는 아이입니다. 남국에서 볼 수 있는 식물이지요.

뉴질랜드에서만 자란다는 크리스마스 나무, 즉 포후투카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자세히보면 다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따뜻한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입니다.

나는 알지요. 이 꽃을. 이 꽃은 내가 태어난 해 기념으로 엄마가 사와서 삼십몇년째 꽃과 열매를 맺고 있는 녀석과 꼭 닮은 나무입니다.







바로 오렌지 나무입니다! 래리의 정원에는 오렌지 나무가 있습니다.

우리엄마의 귤나무는 방안과 비닐하우스에서만 살아야했는데, 래리의 정원에서는 바깥에서 바닷바람을

받으며 쑥쑥 자랍니다. 이 오렌지 나무는 2년에 한번씩 열매를 맺는다고 해요.






이 녀석은 무척 귀한 나무라고 했는데, 이름을 잊어버렸어요.

래리의 정원에는 많이 새들이 찾아옵니다. 래리는 그 녀석들이 언제 날아오고 이름은 무엇인지 어떻게 우는지도 알려주었어요.















정원을 구경한 다음,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좀만 걸어가면, 앞에 바다가 있어서 시 포쓰 에브뉴 인가 봅니다.










이런 길들을 지나서, 바다에 이릅니다.





멀리 원트리 힐도 보입니다.






이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온 이민자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의자에 앉아 출렁이는 바닷물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까요.

언젠가 자리나는, 미국에서 언니가 다녀갔던 날, 언니가 탄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걸 다 보고서도

반나절 내내 공항에 앉아 비행기가 뜨는 걸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망가레 브릿지, 자리나와 래리 스미스의 저 집에 방문하고 싶습니다.

지금쯤 패밀리 뮤지엄은 어떤 모습일까요. 거기에는 어떤 사진들이 더 걸려있을까요.

작년, 남섬으로 떠나던 내게 자리나는, 또 다른 10년을 만들지 마라고 하며,

앞으로 내가 10년을 더 살지 어떨지도 모르지 않니, 라고 했습니다.


다시 가면 벽의 사진들을 하나 하나 가리키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언니는 누구와 결혼해서 조카를 낳았는지,

자리나가 어렸을때의 봄베이는 어떠하였는지, 누구랑 연애를 하고, 어떤 옷을 좋아했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달라고 조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합니다. 내 마음을 알아줄 단 한명의 사람, 단 하나의 이야기, 그런걸 찾아서

우리는 아무리 먼 거리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움의 이름으로 그것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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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혜선, :










새해 첫날 아침,

오늘도 변함없이

눈이 푹푹 나렸다.

왠지 우리 동네가 훗가이도라도 된 것 같았다.



점심때쯤, 아버지와 실갱이를 했다.

나는 아빠가 들어줄 리 없는 부탁+레퍼토리를 지껄였고

아빠의 당연하고도 단호한 No와 함께 그 언쟁은,

정확히 말해 나의 투정은 끝이 났다.

이번에도 아빠 승!


'됐어요. 알았으니, 그럼 내 짜잘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그리하여 아빠는

아주 오랜만에 글자도 잘 안보이는 빛바랜 수첩을 들고

일본에 계신 친척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일본에 먼 친척이 있다.

나의 친 할아버지의 사촌들이다.

할아버지와 사촌들은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갔다.

나고 자란 조선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


일본에서, 일본사람들은 너무 힘들거나 더러워서 하지 않으려하는 일을 했다고 들었다.


해방이 되자, 우리 할아버지는 귀국했고

사촌들은 그 곳에 남았다.

할아버지의 사촌들과 그들의 아들 딸들은 어쩌다 한번씩 한국을 방문했다.

내 평생에 그들이 다녀간 기억이 서 너 번쯤 밖에 없는 걸로 보면

그들은 아마 10년에 한번 꼴로 고국을 다녀간 셈일 게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근래에 한국을 다녀가신 분은

돌아가신 내 친 할아버지의 사촌인 할아버지였다.


몇년전이었다.

우리집에 할아버지가 오셨고,

10년에 한번씩 오셨던 할아버지의 얼굴을

삼십 몇년밖에 안 산 내가 기억할리 만무했다.


우리집에서 주무신 할아버지는

다음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시더니

휴대용 스케치북 같은 곳에 그림을 그리시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는 신기해서 할아버지 옆에 둘러 앉았다.

할아버지는 분홍 색연필로 나무에 꽃을 그려넣은 다음,

물총처럼 생긴 작은 붓으로 그 위를 문지르셨다.

그러자 색연필의 딱딱한 질감이 물에 스르르 풀리면서

스케치북 위에 순식간에 화사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보고 있는 엄마와 나는 스테레오로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우리의 리액션에 기분이 좋아지신 할아버지는

스케치북을 넘겨 다른 그림들을 보여주셨다.

집에 혼자 있을때, 혹은 여행 다니시며 그린 거라고 했다.

그 친근한듯 하면서도 이국적인 풍경들 속에는

꽃과 나무와 호수가 가득했다.

그림들은 소박했지만, 아름다웠다.


엄마와 나는 할아버지의 그림에 감탄했고

'아쿠아쉬'라고 하는, 작은 물통 달린 붓이

스윽하고 색연필 자국 위를 지나갈때 생기는 물결무늬를 신기해했다.




나는 언제인가 일본에 다녀온 친척 아주머니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일본에 있는 친척들의 집을 방문하러 갔는데,

어찌나 높은 곳, 어찌나 깊숙한 골목안에 있던지,

살아도 살아도 그렇게 가난해보일 수 없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아직도 돈을 타러 오는

50이 넘은 가난한 아들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그날 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셨을때

엄마와 내가 보았던 것은

분명코 가난했을 그의 삶의 빛나는 한 자락이었다.

그날의 그는 평온하고 소박하고 아름다워보였다.



할아버지가 다시 일본에 돌아가신 후, 몇달이 흘렀을 때였다.

우리집에 소포가 도착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 날 할아버지의 그림을 보며 감탄하던 엄마와 내가 내 뱉었던

'와! 나도 그림 그리고 싶다.' 란 말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그때 엄마와 같은 집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 물감과 색연필과 아쿠아쉬는 엄마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저 소포에 대한 것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일본 할아버지의 아쿠아쉬를 다시 떠올린 것은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지난 여름이었다.

당시 스스로의 힐링 갱생 차원에서 주말마다 산에 다니던 나는

어느날 갑자기 저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른 산의 능선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 것이다.

그때, 일본 할아버지의 소포가 생각났다.


나는 엄마 집으로 가서, 색년필과 스케치북을 찾았다.


몇년만에 다시 꺼내본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물감과 파레트, 붓, 색년필과 아쿠아쉬는

그 제품들의 뒷면에 '다이소'라는 상표를 붙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우리가 학교 다니면서 썼던 국산 신한물감보다 질이 안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차지가 되었던 스케치북을 넘기다가

비싼 독일제 색연필을 한 가득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려내지 못할, 잊을 수 없는 작품을 하나 만났다.







우리 엄마는,

그림을 잘 그린 다거나, 즐겨 그린다거나 라고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본 순간,

나는 그녀의 인생이 단 번에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저 그림을 안다.

저 그림 속에는 내가 있다.

나를 업고, 새참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보라색 삽을 든 아빠를 따라가고 있는 저 여자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리다.


저건 아마,


그녀의,


젊음,


이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무성하고


들판은 노랗고


아빠는 미소 짓고 있고,


엄마도 그런 것 같다.










나는 궁금해졌다.

할아버지는 요즘,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실까.

할아버지의 집에는, 어떤 그림이 걸려 있을까.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한번도 가본적 없고, 일본어라곤 하나도 모른다.



나는 할아버지와 친하지도 않을 뿐더러,

할아버지가 나를 기억하실지 어떨지도 모른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집에 가보고 싶었다.

가서, 당신이 보내준 스케치북과 물감으로 그린

엄마의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 것이 삶인 것 같았고, 살아가는 이유인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다음달 나에게 휴가가 생겼다.









새해 첫날 아빠와 다투었던 나는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들어주지 않은 아빠에게

쪼그만 부탁 하나를 들어달라고 했다.

몇번 성가시다고 거절하던 아빠는

마침내 오래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나는 아빠에게, 그래도 아빠가 나보다 일본 할아버지와 더 친하니까

새해 인사겸 일본에 전화를 드려서 안부를 여쭤본 다음

우리 딸이 다음달에 일본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한번 찾아뵈어도 되겠느냐, 어떻게 찾아가면 되겠느냐,를 여쭤봐 달라고 했다.


몇번의 시도끝에 겨우 겨우 통화가 되었다.



아빠는 어색하게 새해 인사를 드렸고

그리고 뭔가 떠듬떠듬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주로 아빠가 간략하게 묻고

할아버지가 서툰 한국어로 설명을 하고 계신 듯 했다.


통화가 끝날때까지 아빠는 할아버지께 나의 여행 계획을 말씀드리지 못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엄마와 나는 그 이유를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병원에 계시다고 했다.

올 여름쯤부터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시는데

새해 첫날이라 잠깐 아들과 함께 집에 들렀는데

마침 전화를 받은 거라 하셨다.


병원에서는 정확한 병명도 알 수 없고

치료 할 방법도 없다고 했다고 하셨다.

더 자세한 건 일본어로는 설명할 수 있겠는데

한국어로는 설명하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말을 주고 받는 것도 원할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빠는 일본어를 못했고

곁에 있는 할아버지의 아들은 한국어를 못했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몰랐다.

한 80에서 90사이 쯤?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듣고 있던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노환이실거야. 이제 한국에 못 오시고 돌아가실 수도 있겠다.'




우리 가족의 첫 새해 안부 인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전화를 하기 바란다.


오래 미루고 미루는 전화가 있다면,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길 바란다.


지금 하지 않는다면, 너무 늦을 수도 있다.








올 여름 내가 그렸던 저 그림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할아버지가 다시 보지 못할 지도 모르는, 고국의 산 능선이다.



그래도 나는 일본에 갈 것이다.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고 싶다.


일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리 가족의 한 세대가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


한국에 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그러나 할아버지는 엄마와 나에게 스케치북과 물감을 주셨다.


그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보렴'하고 넌지시 찔러 주신 것과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가난하게 살게될 우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화답할 수 있다.


'할아버지, 오케이^^  알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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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림이 함께 나오는 동화책 두 권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미국 사람입니다.


자기네 나라 말로 썼을 테니까, 영어로 된 책이 겠지요.


영어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영어 이야기를 조금만 하겠습니다.


곧 바뀌게 되겠지만, 현재 나의 직업은 어린이 영어 강사입니다.


아, 중학생들에겐 문법도 가르치고 학교 시험 대비 수업도 합니다.


아마 나만큼 영어에 대한 회한과 애증, 컴플렉스 같은 것이 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던 학교를 가게 되었고,


결국은 그 곳의 영문학과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영어전공과목이 너무 싫었던 나는 D-를 받아도 재수강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영문과를 나왔다는 걸 알게되면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그럼 영어 잘하시겠네요.' 라고 했습니다.


그 때 나는 영문과를 나왔다는 사실이 영원한 형벌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 괴로운 영어와 관계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던 글쓰기나 영화 만들기같은 걸 하면서 돈을 벌기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뭔가 조금은 다른 삶을 살고자 애썼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학원 강사가 되었습니다.


이왕 하는 거,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자 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이니까요.


나는 사람과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했던 영어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했기에 울면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일하던 학원에 영어 도서관이 생겼습니다.


그 곳은 곧 색색깔의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동화책으로 가득찼습니다.


그 곳에서 나는 그 유명한 앤써니 브라운을 처음 만났습니다.


앨런 세이와 윌리엄 스테이그, 로버트 맥클로스키도 만났습니다.


물론 학교 다닐때에 나는 스캇 핏츠 제랄드나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작품이 쓰여진 언어였던 영어를 사랑하기에는


그 책을 읽으면서 찾아봐야했던 영어 단어와 이해되지 않는 문장 구조가 더 많았습니다.


게으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었던 나는


그 높은 문장 구조의 산맥과 그 안에 빽빽하게 심어진 단어라는 나무 숲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히 그 영롱한 숲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에게 스트레스만 안겨주었던 그 언어를 증오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 세살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도서관에서,


나는 그 영어라는 말의 성찬을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윌리엄 스테이그의 <아모스 엔 보리스>를 펴들었던 날이 생각납니다.


책을 받치고 있던 내 두 손바닥 위로,


금빛 반짝이가 섞인 눈부신 언어가 물결처럼 찰랑대며 쏟아져 내렸습니다.


나는 마치 처음으로 물을 만져본 헬렌 켈러처럼,


'아! 이 것이 언어라는 것이로구나.

 영어는 죄가 없었어.

 영어를 미워하게 만든 건 나였어.

 나한테 영어를 억지로 공부하게 만든 어른들이었어.

 영어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이렇게 빛나는 모습으로 있었어.

 영어는 죄가 없었어. 아아.'


내게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의 초등학교 2학년이나 3학년들이 읽을 수 있을만한

어휘로 쓰여진 동화책이 딱이었습니다. 4학년용 책부터는 그림이 거의 사라져서 재미가 없었고

1년학년용 책은 글자가 너무 적었습니다.


글자와 그림이 적당히 아름다운 배합을 이룬 그 2~3학년용 책들은 놀라웠습니다.

그 책들은 순수했고, 자연 친화적이었으며, 어른인 우리는 감히 제기하지 못하는 용감한 질문들

(예를 들면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냐요 같은)로 가득했습니다.


때로 나는 영원히 그 초등학교 2~3학년의 어휘에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는 살아가는 데 중요한 모든 어휘, 모든 질문이 다 있었습니다.

그 이상의 어휘로 이루어진 어른들의 세계를 나는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건 내 모국어로 알고 있는 세계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었습니다.











이제 베라 비 윌리암스를 소개합니다.


그녀가 바로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그녀의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책 제목입니다.








확 땡기죠?








마이 마덜 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겁먹지 말고 읽어보세요.




조금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름답지요?

몇번이나 읽었지만 나는 살짝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여드리려 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페이지는 아껴두겠습니다.




언젠가 영풍문고에서 이 책을 샀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도서관에도 찾아보면 있을 것입니다.

번역된 책을 구하기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여건이 허락한다면, 원문으로 된 책을 구해서 읽어보길 권합니다.


저 장밋빛 의자처럼 포근하게 안겨오는 말의 뉘앙스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떠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함께 영화를 공부했던 친구였습니다.

언제나 엄마가 나오는 시나리오를 써오곤 했던 친구였지요.


난 그 녀석에게 이 책을 선물했습니다.


'이거 니 책이야.'

'너와 같은 1982년에 세상에 나왔어.'


하며 말이지요.


녀석이 저 책을 읽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안 읽었을 확률이 더 큽니다.


무슨무슨무슨 이유로 우리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래서 아마 저 책은 녀석에게 처치 곤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저 책의 어휘와 문장이 녀석이 읽기엔 너무 어려운 수준인지도 모릅니다 헤-


그랬거나 어쨌거나 그래도 저 책은 녀석의 책입니다.











<체리와 체리씨>를 소개합니다.








그림도 모두 베라 비 윌리암스가 그렸습니다.







아버지에게 헌정한 이 책은

앞에서 소개한 엄마에 대한 책보다 4년 늦은 1986년에 나왔습니다.

이로써 베라 비.의 바로 이 비가 베이커의 약자임을 알 수 있구요,

베라 비 윌리암스가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글자를 좀 더 가까이 보여드리겠습니다.


읽다보면 유년에서 날아온 어떤 향이 코끝에 스칠 겁니다.
















이 친구가  Bidemmi 입니다.

말하고 있는 '나'의 윗집에 살구요,

내가 새로 생긴 싸인펜이 생길때마다 가지고 가면

그걸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녀가 찍은 점 하나, 그녀가 그은 선 하나는

곧 가방이 되고, 사람이 되고, 이야기가 됩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숨쉴 틈이 없습니다.

그걸 듣고 있는 독자인 '나'는 그만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넋을 잃습니다.



난 어쩌면 그녀가 이 책을 단숨에 썼을지도 모른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읽던 내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체리를 먹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에게 체리를 선물하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평범한 이야기를 무척 인상깊게 써내는 것을 재능이라 부를 수 있다면

베라 비 윌리암스는 올해 내가 만난 가장 재능있는 작가입니다.














저는 예쁜 것을 좋아라 합니다.

곧 죽어도 예뻐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매 순간, 내 평생 가장 예쁜 모습이고 싶은데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예쁜 것 말고요.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기도 하고 또 재미도 없으니까요.)


특히 예쁜 할머니들을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래서 위 그림의 저 할머니는,

제게 있어 이 책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체리와 체리씨>도 여기까지만 보여드릴께요.



베라 비 윌리암스는, 참 신기한 작가입니다.

딱 두권밖에 못 읽어보았지만

그녀의 책은 제게

제가 아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던 순간도 누군가가 떠올랐습니다.

난 그녀라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맡았던

우리의 유년에서 건너온 오래된 싸인펜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녀 역시 Bidemmi 처럼,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그녀가 내게 보내준,

그녀가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그녀가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것은,

이 동화책에 나오는 Bidemmi가 자기집 마당 한쪽 구석에

체리 씨앗을 심는 이유와 닮았습니다.


난 그녀가 Bidemmi의 체리나무를 보고, 그 순간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이쯤되면 베라 비 윌리암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어질 것입니다.







아, 저 옷!
<어 체어 포 마이 마덜>의 그 의자를 닮은 원단!


올해 85살인 그녀는 지금 뉴욕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 동화책을 낸 게 48살때라고 해요.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일들을 했고,

남편과 이혼을 한 후에 캐나다로 건너가

동화작가가 되기 위해 헌신했다합니다.

비폭력과 탈핵을 위한 활동을 했으며

빵집을 운영하기도 하고,

대안 커뮤니티를 만들기도 하고,

그 안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교사로도 일했다 합니다.


거기까지 알게 되자 순간, 이거다! 하는 느낌이 왔습니다.


사실은 며칠전 내년부터 일하기로 한 대안학교의 학예회에 다녀왔습니다.

갔다와서부터 너무 많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억압된 환경에서 고 퀄리티를 뽑아내는 것이 미덕이라고 훈육받아온 내가

저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내가 과연 그 월급을 받고 살아갈 수 있을까.

반짝이 들어간 트위드 원피스도 사야하고

빨간 부츠도 사야하고

피자 파스타도 먹고 싶고

눈부신 뢰티나 디스플레이도 갖고 싶은데

그런 것들을 안사고 안먹고 참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내게 살게 될 집에 따뜻한 물은 나올까.

방은 안 추울까.

아.. 그리고 화장실은...

난 비위도 약한데..생태 화장실에 적응할 수 있을까..



...고만 물릴까...

가지 말까...



옆에 있던 친구는 그런 나를 보며 한숨만 달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요, 체리와 체리씨를 읽고 나서

베라 비 윌리엄스를 검색해보고 나서

그 한숨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요, 힘이 들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지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야

지 마음이 시키는대로 살아야

50이 넘어도 저렇게 상콤하고 예쁜 동화책을 쓸 수 있습니다.


그녀가 50이 넘은 나이에 가장 활발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쭉 계속 이렇게 살랍니다.



내가 무엇이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느낍니다.


과정은 목적입니다.


나의 삶은 언제나 그 순간으로 목적입니다.


그냥 매 순간 느껴지는 대로 살겁니다.


결국은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위해 복무하지 않을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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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깊은 숲 속에 있는 줄 몰랐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헐레벌떡 20분을 뛰어 올라갔다.

저 오솔길을 지나자, 운동장을 사이에 둔 한옥 건물 몇 채와 체육관 건물 같은 것이 나타났다.

너무 숨이 찼던지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무 장작을 패고 있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지는 못했다.








'14박 15일 동안 하루에 20킬로정도 걸으면서 둘레길 완주 할 수 있으세요?'


내가 받은 첫번째 질문이었지 싶다.

내가 응시한 포지션?은 영어 선생님.

그러나 영어 수업은 일주일에 세 시간 밖에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튼튼하고 기운좋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







'트럭을 운전 할 수 있으신가요?'

'세상보기라고, 아이들과 함께 공동체 탐방을 다녀오기도 하구요,'

'늦봄엔 모내기, 늦가을엔 김장을 함께 해요.'


'여름과 겨울에는 스님들과 함께 하안거, 동안거를 하면서 공부를 합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예불을 드려요. 이런 의식에 거부감은 없으신가요?'







-저는... 새벽 4시에 잠이 들어요...


-운전은 할 수 있지만, 트럭은...


-그런데, 14박 15일은... 텐트에서 자나요?


'아니요, 산장 같은 곳에서 자요.'


-아, 그러면...제가 체력이 약한 편이긴 한데, 깡이 있는 편이라서요...


-꼭 해야하는 일은 기를 쓰고 해내긴 해요...


-그래도 자신은 없어요...



'혹시 여기 일하시게 되면, 영화 수업을 진행하거나 영상 작업장을 만들 수 있으세요?'








아, 그게(나는 좀 생각에 잠긴다..예상 못한 질문은 아니다.)


수업을 할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영어에 있어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써의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을 거예요.


학교 홈페이지에서 보고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를 읽었는데,


가장 좋은 가르침은 교사 스스로 그 일을 즐겁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렇지만 영화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영화로 인해 상처를 입은 몸이기에


영화를 즐겁게 사랑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 할 것 같아요.







'지방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영어나 수학 선생님을 구하기는 쉽지 않은 편이에요.

국어나 사회, 역사, 철학 과목은 그래도 좀 많아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출퇴근 하는 직장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여러가지 일이 많아요. 평범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생활하기에 쉬운 곳은 아닙니다.'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쉽게 살아오지 않았어요.

-지원 동기서에서 제 자신을 많이 보여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면접을 마치고 혼자 천천히 학교를 둘러 보았다.

솔방울들이 걸려 있는 교실에 들어갔을때,

창밖으로 거대한 산의 능선이 보이는 교실에 들어갔을때,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아이가 누가 들어오는지 신경도 안 쓰고

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걸 보았을 때,

나는 정말이지 이 곳에 오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나는 창밖으로 산이 보이는 국민학교에 다녔다.

그 산은 계절마다 색을 바꿨다.

첫눈이 내릴때면, 그 산자락 위로 싸락 눈이 휘휘 날리는 걸 보고 넋을 잃곤 했다.


내가 만약 지금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 있다면,

그건 많은 부분, 어렸을 때 산을 보고 자란 것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나올 때, 허겁지겁 들어오느라 잘 보지 못했던

장작을 패고 있는 분들을 보았다.

초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는 굴뚝에서 연기도 났다.

나무 냄새와 연기 냄새가 섞여서 바삭바삭하면서도 촉촉한 가을 느낌이 났다.


내가 겉에서 피상적으로 보기에

그 삶은 행복해보였다가, 아니라

그냥 옳아 보였다.







우리는 알고 있다.

옳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자신이 없다.

그 곳이 나와 인연이 있을지 없을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학교의 면접을 준비하기 위해서 읽었던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를 통해

그 동안 내가 학원에서 만났던 나를 힘들게 했던 수 많은 아이들이, 아무 문제가 없는 아이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나라는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그 곳에서 일을 하게 되건 안하게 되건,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면접 보러 갔다가 내려오는 산길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가을의 끝자락을 만나게 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어젯밤에 잠들기 전에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읽고 있었다.

지금은 런던에 있는 예전에 함께 일하던 원어민 강사 두명이 내일 스톤헨지에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스톤헨지가 테스의 마지막 장의 배경이었다는 것이 생각났고

갑자기 지금은 모든 디테일이 생각나지 않는 그 책이 너무나 다시 읽고 싶어졌었다.


이런 장면이 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일어나지를 못하자

어린 테스와 그녀의 동생이 대신 벌통을 내다팔러 장에 가기로 한다.

그 둘은 잠에서 덜 깬채로 새벽 1시에 일어나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늙은 말 프린스를 끌고

벌통을 마차 뒤에 실은 채 어둡고 추운 숲길을 달린다.

무시무시한 산 그림자와 나무 그림자,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몰던 남매가 이런 대화를 한다.



별들도 자기네 세계가 있다고 그랬지, 누나?

그래.

그럼 우리들이 사는 세계와 같아?

그건 잘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거야.
때때로 별들은 우리집 사과나무에 달려 있는 사과와 같을지도 몰라.

대개가 먹음직스럽고 싱싱하지만 간혹 벌레먹은 것들도 있겠지.

우린 어느 쪽에 살고 있는 편이야? 싱싱한 거야, 아니면 벌레먹은 거야?

벌레먹은 쪽일지도 몰라.

저렇게 별이 많은데, 싱싱한 걸 고르지 못하다니 정말 불행한 일이야.

그래.

정말 그래, 테스 누나.

이 신기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고 더욱 깊은 감동을 받은 아브라함은 누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만일 우리들이 싱싱한 별을 골랐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글쎄, 아버지는 저렇게 기침으로 고생하지도 않으셨겠지.
그리고 이번 장에 못 갈만큼 술에 취하지도 않으셨겠지.
그리고 어머니도 매일매일 해도 끝이 없는 빨래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겠지.





산을 반쯤 내려온 곳에서

나는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사과 별들이 가득한 과수원 우주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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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혜선, :

오늘 아침.

2012. 10. 8. 22:53 from 지리산 이전의 삶
















2012. 10. 08. 월요일 아침 7시 50분.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버스 창 밖 풍경.






새벽에 자고 점심때 일어나는 생활패턴을 가진 사람이 이런 풍경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마을에 내려 앉은 가을 안개가 아직 하늘로 올라가기전의 아침 말입니다.







어제밤, 집에가는 버스를 놓쳐서 실상사에서 자고 가게 되었습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나에겐 클렌징 오일도, 폼 클렌징도, 스킨 로션도, 수건도, 다음날 바를 썬크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세수를 포기했습니다.







처음 들어와보는 절방입니다.

그 방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인 것 같았습니다.

그 방은 좁았으나, 서글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잠을 청해야했습니다.

그러나 평소 자는 시간이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불을 껐습니다.

창호지 바른 나무 문의 문살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나는 곧 기억해내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열두살이 될때까지 꼭 저렇게 생긴 문을 보면서 할매와 함께 잠들었다는 걸요.

그건 내 인생의 삼분의 일이 넘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걸 잊고 살았을 수가 있을까요.


잠시, 나는 지우지 못한 메이컵이 발생시킬 피부 트러블에 대한 걱정을 놓아버렸습니다.

그 작은 방은, 곧 검고 커다란 우주가 되었습니다.

하늘 위로는 별이 초롱초롱했을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세상의 모든 공간인 그 방에 슬픔이 가득찼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어느날, 당신에게 저 방이 주어진다면,

달과 별이 빛나는 우주와 당신 자신만이 남겨진다면,

저 방의 공기가 슬픔으로 가득 차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나는 엎치락 뒤치락 했습니다.

네시 쯤에 어렴풋이 깨었습니다.

어느 스님이 아침 예불을 알리는 목소리 때문이었습니다.

스님은 마당을 혼자 돌아다니며 큰 목소리로 염불? 비슷한 것을 했는데

그 젊고 목청좋은 소리가 잠에 덜깨 쩍쩍 갈라지는 것이 매우 인간적이었던지라

나는 자다가 씨~익 미소를 지었습니다.



두번째로 깬 것은 여섯시가 좀 넘어서입니다.

밖에서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들 가운데 사람의 목소리로 된 '울력'이라는 단어가 섞여있었습니다.

그 단어는 아직 누워있던 나에게 죄책감이란 것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챙피함이라는 감정이 내가 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나는 일어나 앉아 이불을 개고, 첫차시간을 확인하고,

짐을 챙긴다음, 문간에 붙어앉아 기다렸습니다.


울력하는 사람들의 비질 소리가 내게서 멀어지기를.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비질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가 완전히 멀어져 다른 구역으로 이동했다 확신한 순간

나무 문을 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문앞에 붙어앉아 귀 귀울였던 비질 소리는,

하늘로 올라간 듯 했습니다.

오늘 아침, 보살님들과 처사님들이 절 마당을 쓸때

바람은 하늘을 쓸었을 겝니다.







마천, 삼정마을에서 나오는 아침 첫 버스에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앞좌석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꽉 찼고, 뒤에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마을을 하나하나 지날때마다 학교가는 아이들이 탔습니다.












어디서 들은 말인지, '영혼을 치유하는 것은 감각이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 친구는 이 사진을 보고 가마솥이 떠올랐다 했습니다.

그녀는 아마 배도 부르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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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혜선, :


추석날, 나는 새벽 네시에 잠에서 깨,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더듬더듬 사전 찾아가며 읽다가
어쩌면 이렇게 소설이 아름다울까 경탄하다가
8시가 좀 넘어 부모님집으로 가 차례를 지냈습니다.
사촌들이 낳은 조카들을 보고
차례상 설거지를 하고
세군데에 성묘를 가고
성묘가는 길에 아버지를 졸라서 운전 연습을 했습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운전연습을 하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몇해전 아버지의 강요로 운전면허를 땄으나
나는 차가 참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나 한사람이라도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노고단에 다녀온 이후입니다.
노고단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멀미를 너무 심하게 했습니다.
그때 문득 내 인생의 언제인가쯤 누군가 내게 했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If you drive, you don't get car sick.' 그것은 인도식 영어 엑센트였습니다.
10년전, 뉴질랜드에 있는 아시아계 여성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단체에서
잠깐 일했을때 만났던 인도출신의 심리 치료사의 목소리가 그 순간 내 귓가에 울렸습니다.
그래서 기사 아저씨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던 나는
운전석 바로 딱 뒤에 붙어 앉아서 가지고 있던 모자를 핸들삼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무척이나 신기하게도 멀미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굴곡이 많은 길을 지날때는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의 뒷자석에 타고 있다면
멀미를 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굴곡이 많은 길을 지날때
내가 운전을 하면, 이 길 다음에 이어질 길의 방향을 내가 먼저 보고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능동적으로 차를 움직일 준비를 합니다.
그럴때 내 몸은 덜 고통스럽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 난 좀 똑똑한 것 같아요!' 물론 아버지는 동의하셨습니다.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하는 들판과 논둑에 흔들리고 있는 억새와
코스모스들이 길가에 핀 낮은 능선을 달려 올라가는 길은
신났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운전을 하면서 길에 핀 꽃들이 보인다면, 인제 니 혼자
운전을 해도 될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녁에는 큰 외삼촌이 오셨습니다.
46년생인 외삼촌은 이제 백발이 성성해져 있었습니다.
외삼촌과 대판 싸웠습니다.
저희는 엄마가 햬주신
맛있는 나물에 밥을 비벼먹고
그 귀하다는 송이를 들기름에 찍어먹고
...싸웠습니다.
왜냐하면 외삼촌이 내게
박근혜를 찍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4대강 문제에 대한 심한 견해 차이로
삼촌이 벌떡 일어나시더니
저를 '빨갱이들과 다를바 없는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몰아부치신 것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싸웠고ㅜㅜ
삼촌에게 저보고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한 것에 대해
사과 해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삼촌은 사과하셨습니다.
엄마는 그런 우리의 모습에 화가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엌으로 가버리셨고
아빠는 온화한 방법으로 계속 제 편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잘못했다는 걸 금방 깨달았습니다.
며칠전에는 아이를 때리더니
이번에는 노인과 최선을 다해 싸운 것입니다.
그런 제가 미웠습니다.
그래서 외할머니집에 가는 길에
외삼촌의 차에 타고가며
외삼촌이 살아온 인생 얘기를 들어드렸습니다.
저는 그 분이 6.25를 겪었고, 박정희 시절 김신조 간첩단이 남파되었을때
그들과 싸운 병사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어 10시간이 걸리던 길을 3시간만에 가게 되었을때
그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너무 감사했다,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모든 얘기들을 듣자, 그가 나를 향해 '빨갱이들과 다를게 없는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한밤중이 되어 우리는 외할머니가 사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 얘기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한 것입니다. 외할머니의 얘기를.
원래 앞의 얘기들을 할 계획은 없었는데 쓰다보니 이렇게 길어져버린 것입니다.

깊은 산속에 있는 외할머니의 집에 갔다가 내가 사는 집으로 돌아 온 시간이 아마
11시가 훨씬 넘은 때였을 겁니다.
나는 녹초가 되어서 집에 왔고, 친구랑 수다를 좀 떨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늦게까지 깊게 잤습니다.
일어나서 이불 먼지를 털고 밥을 먹고
'말하는 건축가'를 다운받아 놓고
버스를 타고 내가 좋아하는 들판으로 가서 한시간을 걸었습니다.

어젯밤에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외할머니가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녀는 내가 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한 할머니입니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 100살입니다.

'나, 며칠전에 꿈을 꾸었어.
벽계수가 나왔어. 벽계수가 나를 보더니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더라고.
그래서 따라갔어. 거기 가니까 사람들이 많았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없이 다 어울려서 춤추고 노래부르고 놀았어.
어찌나 좋던지. 깨보니까 꿈이더라고. 아, 며칠전에 꾼 꿈인데,
벽계수 또 나왔으면 좋겠어.'

그녀는 주름 가득한 그 작은 입으로, 어쩜 그렇게 귀엽게 말하던지요.

엄마와 다른 친척들은 그 벽계수를 저승사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은 그것과 조금 비슷하지만 또 조금은 다릅니다.

나는 그 꿈이 그녀가 100년동안 꾸어왔던 꿈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짐작하는 건 작년에 외할머니가 나온 책을 보고서입니다.
어떤 사진작가가 1살부터 100살까지 사람들 한명씩을 선정?해
그들을 사진찍고 인터뷰한 책을 냈습니다.
작년에 나온 그 책에서 나의 외할머니는 99세 대표?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사진은 못~ 나왔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저는 외할머니를 더 잘 찍을 수 있어요.
그러나 인터뷰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한학을 공부하고 싶었어.'

나는 그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렸을때 외할머니의 할아버지는 서당을 했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여자라 서당에 갈 수 없었기에
남자아이들이 배우는 소리를 듣고 공부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걸 본 외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외할머니에게 공부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딸은 시집을 가야했습니다.
남편은 결혼할 준비가 안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저희 이모인 큰 딸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집을 나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고 했습니다.
어린 그녀는 글을 사랑하던 여자였고
당연히 살림을 잘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큰 딸인 이모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삸바느질해서 너를 대학교까지 공부시켜 줄께'.

그러나 10년정도 후에 할아버지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줄줄이 자식들이 태어납니다.
우리 엄마가 그 막내입니다.
결국 그 아이들을 대학교에 보내 주지는 못했고
의지가 강한 아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 자기 힘으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아직까지 그녀는 많은 한시들을 외우고 있습니다.
치매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벽계수도 아마 자신이 외우고 있는 한문 텍스트에 나온 인물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벽계수가 나오는 꿈을 또 꾸고 싶다고 말했지만
생전에 영감이 정해놓은 묘자리,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이미 누워계시는,
바로 그 영감의 옆자리 말고, 자신이 가고싶은 자리에 묻히고 싶다고 계속 말합니다.


'나 바람이 술술 잘 통하는 여기 갈산재 어디 묻어줘. 이 넓은데 나 하나 갈 곳 없겠어?'

그건 남은 자식들이 결정할 일입니다.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남편 대신 벽계수를 택한 것입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백년을 가는구나.

그녀는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떤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잔잔하고, 조용하고, 살포시 살포시 웅얼웅얼 한시를 읊으면서 말입니다.


저녁무렵, 집에 돌아왔습니다.
'말하는 건축가'를 보았습니다.
말하는 건축가는 내가 올해 본 세번째 영화가 되었습니다.
첫번째 영화는 '건축학개론'이고 두번째 영화는 생텍쥐베리의 생애를 담은 짧은 흑백 기록영화
였습니다.
영화는 나에게 아프게 헤어진 잘난 옛날 남자친구들 같아서
나는 아직도 새로운 연인을 만나지 못해서, 그를 생각만해도 너무 고통스러워져서
영화관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어떤 것이었습니다.

흑백기록 영화를 예외로 한다면,
내가 올해 본 두편의 영화는 모두 건축에 대한 것입니다.
재밌습니다.
건축학개론은 96학번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고
말하는 건축가는 이제는 세상을 떠난 65살의 건축가의 이야기입니다.
말하는 건축가는 건축학개론보다 훨씬 젊어서
심지어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고양이를 부탁해보다 더 젊습니다.

건축학개론을 보았을때, 나는 그 영화를 너무 좋아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건축가를 보았을때
나는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나에게 위로를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위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망의 조금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지나치게 많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느끼기도 해서요.
(하지만 어떤 밤에는 애타가 위로라도 찾아 엉엉 울기도 하지만요.)

이 영화는 말이죠, 내가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 이런 것들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건축학개론을 보았을때와 달리, 감독과 촬영감독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저런 삶을 살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도
내가 저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물론 나는 영화에서 감독 정재은을 보았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나는 예전에 고양이를 부탁해 디비오를 가지고 있었고
몇번 돌려보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년전에 그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과 골방에 틀어박혀 그 영화를 보던 나는
10년 후인 지금 더 젊은 것 같습니다.

나에게도 영화를 한다는 예술행위자체가 구원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이 고통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찬찬히 잘 고찰해볼 것입니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어떤 지나가는 사람이 도시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공간이 도시'인 것 같다고.

나는 내 고민을 풀어줄 힌트 하나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 욕망을 위해서 내 삶을 포기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것이 내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욕망의 실체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욕망이 아닌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내가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 삶이 끝난 후의 무덤 속에서라도 100년을 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



오늘 산책했던 들판의 끝에 고택이 있었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의 고택은 한산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살금 살금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습니다.
종부로 보이는 분이 사랑채에서 나오십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사랑채 뒤, 종부가 기거하는 듯한 안채 마당을 가로지르는 정원위 빨랫줄에 널린
다섯개의 하얀 행주가 정갈해보였습니다.
종부는 저에게 신발을 벗고 사랑채로 올라와서 안을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섬돌에다 살금살금 신발을 벗어넣고
조심조심 마루로 올라가서 사랑채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종부가, '사랑채에서 가장 예쁜 공간이 있는데, 내 특별히 보여드리지.'
하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다실이에요. 이집에서 가장 예쁜 곳이지요. 아무한테나 보여주지 않아요. 여름이면 여기 문을 다 열어 놓아요.'
그 다실에는 뭐랄까요, 종부는 예쁘다고 표현하셨지만, 예쁘다기 보다는,
짙은 갈색빛의 오래되고 정갈한 시간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대구 한복판에 있던 수도회의 수녀님이
'여기가 우리가 사는 방이야. 이거 아무한테나 보여주는 거 아니란다.'하고
자신의 방문을 열어 보여주셨을때의 느낌과 같았습니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던 조그만 방이
내 집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런 순간을 기다립니다.
경부 최부잣집에서 시집오셨다는 위엄있는 종부,
또는 아들많은 집의 막내딸이었던 수녀님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시간이 깃든 방의 문을 제게 열어주듯이
나 보다 먼저 이 길을 걸은 누군가가
자신의 삶의 지혜의 문을 열어보여주는 순간을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걸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치 카페 뤼미에르의 요코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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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베리는 1900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레옹 베르트를 만난 것은 서른 다섯살 이후이다.

그와 레옹 베르트는 22살의 나이차이가 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누구보다 서로의 영혼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

레옹 베르트에게


이 책을 어떤 어른에게 바치게 된 것을 어린이들이 용서해주었으면 한다.

내게는 그럴 만한 진지한 이유가 있다.

그 어른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니 말이다.

그 밖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 어른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까지도 다 이해할 줄 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이유는, 그 어른이 지금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춥고 배고픈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 어른은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서른 다섯살이 넘은 이후에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친해질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

그의 나이가 나와 얼마나 차이 나는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로부터 가장 소중한 책/이야기를 헌정 받을 수 있고

또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이야기를 그에게 헌정할 수 있다.


삶이라는 것은 참 아름답다.

나는 이럴때 그런 걸 느낀다.




올해 한국 나이로 서른 다섯살이 된 나는

내 또래 친구들과 잘 말이 통하지 않는 편이다.

나보다 열몇살이 아래라면 그래도 좀 통한다.

그러나 나와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은

올해 여섯살이나 일곱살이 된 사람들이다.



이런 친구들은 나를 알아본다.


어제는 친구의 딸 윤아와 만나 함께 종이 인형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종이 인형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윤아를 그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 숱이 너무 많아져 버려서

윤아의 제안으로 오려내게 되었고,

일단 오리기 시작하자

어렸을때 종이 인형놀이를 하던게 생각났다.

그래서 옷을 만들게 되었다.




윤아와 나, 그리고 또 다른 내 친구는 자정까지 같이 인형 옷을 만들었다.

곧 잠이 쏟아져왔고, 우리는 피곤했으나

윤아는 지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인형의 남자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녀의

'남자 친구 만들어 주세요.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요'는

다음날 새벽과 아침 내내 계속 되었다.







결국 나는 줄무늬 티셔츠에 긴 청바지를 입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인형의 남자친구를 만들어주고 나서야

~놓여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아침을 먹고,

윤아의 유치원 근처에 있는 ECC건물 화장실에 같이 다녀온 다음 헤어졌다.



윤아는 이화 유치원에 다니는데, 친구는 언젠가 윤아가 이렇게 말한적 있다고 했다.


"우리 유치원 안에 대학교 있다~"



윤아가 ECC로 달려내려가는 모습, 또 달려 올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매일 대하는 유년의 풍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곳으로 왔다.

저 보랏빛 새들을 따라.








이 곳에 전시된 <어린왕자> 책 속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그림들과

생텍쥐베리가 어린왕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렸던 드로잉들과

그의 작은 그림들이 곁들여진 편지들을 보며


나는 나에게 가슴아픈 일이 생겨

주말에 불현듯

이제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아졌던 서울에 오게 된 것이 감사했다.

이 전시를 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삶이란

곳곳에 아름다운 우물을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내 가방은 무거웠지만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쉬면서

모든 그림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걸로도 성이 안 차

그 모든 그림이 담긴 도록을 샀다.

그리고 나를 가장 많이 울린(실제로 울지는 않았다.) 그림 몇개는

엽서와 포스터의 형태로 지금 우리집에 붙어있게 되었다.







어린왕자가 여행중에 만났던

어느 별에 살던

허영심이 많은 남자의 원안이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감탄받고 싶어하는

이 사람의 욕구를 드러내고자

화려한 옷, 화려한 구두, 화려한 왕관을 그렸다고 한다.



나는 이 사람이 나 처럼 느껴졌다.

그는 슬펐고, 귀여웠고, 애틋했고, 사랑스러웠다.








나중에, 그는 책에서는 이런 모습으로 그려졌다.









생텍쥐베리의 외투이다.

참 컸다.


조종사로서 그는 많은 비행과 전투에 참여했다.

그가 어린왕자를 썼던 것은 1942년이다.

그는 그로부터 두 해 후인 1944년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프랑스 군의 일원으로 비행하던 중 독일군에 의해 격추당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메모와 편지에는 전쟁을 걱정하는 내용이 많았다 한다.

긴 눈썹을 가진 저 남자그림 아래 글씨는

'어찌나 걱정이 되는지'라는 의미라 했다.



전시장 한쪽에는

오래전에 제작된 18분짜리 기록영화가 상영중이었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두번째로 본 영화가 되었다.


안데스 산맥위를 비행하는 화면,

사막위에 불시착한 화면들 위로,

그대로 따박 따박 받아적고 싶은

삶의 진실들이 쏟아졌다.


내 기억이 허락하는 몇개를 여기에 적어둔다.


"나는 도전했고 실패했다.

나는 받아들인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다."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은 괜찮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살아돌아간다면,

이 필요하면서도 '무의미한'행위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에 결속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닐지라도

불의로 인한 타인의 불행 앞에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가의 문제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참여하고 나누는 것이다."







전시장을 나와, 유리창에 비치는 어린왕자와 여우 사이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시장이나 꽃이 많은 정원에 가면,

특히 주말에는 연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한번씩 잊혀지지 않는 커플이 있다.

로토루아 박물관 입구에 손을 잡고 서 있던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 할머니 커플.

오클랜드 윈터가든을 나서든 어리고 말랐던 소년 게이 커플.


나는 그들 연인들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었다.


오늘 보았던 티셔츠를 맞춰 입고 있던 소년 커플도 그러했다.


그들은 너무나 젊고 진지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늦은 오후가 되어 밖에 나왔을때

나를 가장 많이 울렸던 그 그림과 다시 한번 만난다.






"너희들은 누구니?"

어린 왕자가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 물었다.

"우린 장미꽃이야." 그들이 대답했다.

"아, 그래?"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자신이 몹시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의 꽃은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고 늘 그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정원 한 곳에만 똑같은 꽃이 오천 송이나 피어 있는 게 아닌가!



......



'난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꽃을 가진 부자인 줄만 알고 있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가진 꽃은 겨우 평범한 장미 꽃이군.

그리고 기껏 무릎까지 밖에 안 오는 화산 세 개.

그 중 하나는 영영 꺼져버렸는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 가지고 대단한 왕자가 되긴 틀렸어....'


그래서 그는 풀밭이 엎드려 울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래서 그 풍경은 더 쓸쓸해 보였다.

동대문 디자인 프라자의 크고 멋없는 건물들과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스카프를 휘날리며 서 있는 그는.




나는 내 영화가 생각났다.


내 영화는 나의 작은 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장미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그 꽃에 물을 주고 가꾸었던가.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는 너무 평범해'라고 했던가.









나는 장미 꽃 담장 앞에 서 있는 어린 왕자의 눈과 코와 입이 짓고 있는 표정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그와 함께


나의 슬픔을 애도하고 싶었다.








녀석은 게스트하우스 같은 내 방 매트리스 옆으로 왔다.


내가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없을 지는 모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아꼈던 많은 디비디들을 처분했거나 내가 알 수 없는 구석으로 처박아 두었고


지난 8개월간 단 한편의 영화밖에 보지 못했지만(아, 오늘 옛날 기록영화를 하나 보았지. 그러면 2편.)


이사를 오면서도 저 카페 뤼미에르 포스터를 떼어내지 못했다.


저 영화를 처음 보고 난 후의 며칠이 생각난다.


내 일상은 계속 저 영화속에 있었다.


나는 마치 요코가 된 것 같았다.


요코처럼 지하철 계단을 오르 내리고 빨래를 널고 요리를 했다.




나는 아마, 분명히, 저런 영화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저런 영화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책을 찾고,


사람을 만나고, 사람에 대한 글을 쓰고,


소리를 채집하고, 사진을 찍고,


아이가 생기면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16만원짜리 루이뷔통 짝퉁이나 샤넬 짝퉁이나

뭐 이런 사이트를 찾아보는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가방을 살 돈으로 책을 사고 기부를 할 것이다.









어제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 기차가 평택을 지날 때

거대한 버섯같기도한 구름과 그 뒤로 펼쳐지는 불타는 노을을 보았다.

그 구름은 커다란 버섯아래 작은 공룡 몇마리를 데리고 떠가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지.

나는 평택이 건네주는 인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창밖에 코를 박고 있다가 생각해냈어.


그래, 이맘때이지. 초가을은 노을이 아름다울 때야.

일년중 아주 짧은 몇 안되는 나날들.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기분 이상해지게 만드는 날들.


1년전에도 저런 엄청난 노을을 보았지.

한강위의 무슨 대교였지 싶다. 뚝 섬 유원지 근처.

기억하니, 얘들아.

엉망이 되어 징징 거리는 나를 니들이 돌봐 줬잖니.


그 날의 노을, 찾아보니 아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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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Josep glacier in Westland, south island, New Zea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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