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나는 새벽 네시에 잠에서 깨,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더듬더듬 사전 찾아가며 읽다가
어쩌면 이렇게 소설이 아름다울까 경탄하다가
8시가 좀 넘어 부모님집으로 가 차례를 지냈습니다.
사촌들이 낳은 조카들을 보고
차례상 설거지를 하고
세군데에 성묘를 가고
성묘가는 길에 아버지를 졸라서 운전 연습을 했습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운전연습을 하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몇해전 아버지의 강요로 운전면허를 땄으나
나는 차가 참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나 한사람이라도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노고단에 다녀온 이후입니다.
노고단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멀미를 너무 심하게 했습니다.
그때 문득 내 인생의 언제인가쯤 누군가 내게 했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If you drive, you don't get car sick.' 그것은 인도식 영어 엑센트였습니다.
10년전, 뉴질랜드에 있는 아시아계 여성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단체에서
잠깐 일했을때 만났던 인도출신의 심리 치료사의 목소리가 그 순간 내 귓가에 울렸습니다.
그래서 기사 아저씨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던 나는
운전석 바로 딱 뒤에 붙어 앉아서 가지고 있던 모자를 핸들삼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무척이나 신기하게도 멀미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굴곡이 많은 길을 지날때는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의 뒷자석에 타고 있다면
멀미를 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굴곡이 많은 길을 지날때
내가 운전을 하면, 이 길 다음에 이어질 길의 방향을 내가 먼저 보고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내가 먼저 능동적으로 차를 움직일 준비를 합니다.
그럴때 내 몸은 덜 고통스럽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 난 좀 똑똑한 것 같아요!' 물론 아버지는 동의하셨습니다.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하는 들판과 논둑에 흔들리고 있는 억새와
코스모스들이 길가에 핀 낮은 능선을 달려 올라가는 길은
신났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운전을 하면서 길에 핀 꽃들이 보인다면, 인제 니 혼자
운전을 해도 될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녁에는 큰 외삼촌이 오셨습니다.
46년생인 외삼촌은 이제 백발이 성성해져 있었습니다.
외삼촌과 대판 싸웠습니다.
저희는 엄마가 햬주신
맛있는 나물에 밥을 비벼먹고
그 귀하다는 송이를 들기름에 찍어먹고
...싸웠습니다.
왜냐하면 외삼촌이 내게
박근혜를 찍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4대강 문제에 대한 심한 견해 차이로
삼촌이 벌떡 일어나시더니
저를 '빨갱이들과 다를바 없는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몰아부치신 것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싸웠고ㅜㅜ
삼촌에게 저보고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한 것에 대해
사과 해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삼촌은 사과하셨습니다.
엄마는 그런 우리의 모습에 화가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엌으로 가버리셨고
아빠는 온화한 방법으로 계속 제 편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잘못했다는 걸 금방 깨달았습니다.
며칠전에는 아이를 때리더니
이번에는 노인과 최선을 다해 싸운 것입니다.
그런 제가 미웠습니다.
그래서 외할머니집에 가는 길에
외삼촌의 차에 타고가며
외삼촌이 살아온 인생 얘기를 들어드렸습니다.
저는 그 분이 6.25를 겪었고, 박정희 시절 김신조 간첩단이 남파되었을때
그들과 싸운 병사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어 10시간이 걸리던 길을 3시간만에 가게 되었을때
그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너무 감사했다,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모든 얘기들을 듣자, 그가 나를 향해 '빨갱이들과 다를게 없는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한밤중이 되어 우리는 외할머니가 사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 얘기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한 것입니다. 외할머니의 얘기를.
원래 앞의 얘기들을 할 계획은 없었는데 쓰다보니 이렇게 길어져버린 것입니다.

깊은 산속에 있는 외할머니의 집에 갔다가 내가 사는 집으로 돌아 온 시간이 아마
11시가 훨씬 넘은 때였을 겁니다.
나는 녹초가 되어서 집에 왔고, 친구랑 수다를 좀 떨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나는 늦게까지 깊게 잤습니다.
일어나서 이불 먼지를 털고 밥을 먹고
'말하는 건축가'를 다운받아 놓고
버스를 타고 내가 좋아하는 들판으로 가서 한시간을 걸었습니다.

어젯밤에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외할머니가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녀는 내가 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한 할머니입니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 100살입니다.

'나, 며칠전에 꿈을 꾸었어.
벽계수가 나왔어. 벽계수가 나를 보더니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더라고.
그래서 따라갔어. 거기 가니까 사람들이 많았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없이 다 어울려서 춤추고 노래부르고 놀았어.
어찌나 좋던지. 깨보니까 꿈이더라고. 아, 며칠전에 꾼 꿈인데,
벽계수 또 나왔으면 좋겠어.'

그녀는 주름 가득한 그 작은 입으로, 어쩜 그렇게 귀엽게 말하던지요.

엄마와 다른 친척들은 그 벽계수를 저승사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은 그것과 조금 비슷하지만 또 조금은 다릅니다.

나는 그 꿈이 그녀가 100년동안 꾸어왔던 꿈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짐작하는 건 작년에 외할머니가 나온 책을 보고서입니다.
어떤 사진작가가 1살부터 100살까지 사람들 한명씩을 선정?해
그들을 사진찍고 인터뷰한 책을 냈습니다.
작년에 나온 그 책에서 나의 외할머니는 99세 대표?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사진은 못~ 나왔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저는 외할머니를 더 잘 찍을 수 있어요.
그러나 인터뷰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한학을 공부하고 싶었어.'

나는 그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렸을때 외할머니의 할아버지는 서당을 했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여자라 서당에 갈 수 없었기에
남자아이들이 배우는 소리를 듣고 공부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걸 본 외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외할머니에게 공부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딸은 시집을 가야했습니다.
남편은 결혼할 준비가 안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저희 이모인 큰 딸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집을 나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고 했습니다.
어린 그녀는 글을 사랑하던 여자였고
당연히 살림을 잘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예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큰 딸인 이모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삸바느질해서 너를 대학교까지 공부시켜 줄께'.

그러나 10년정도 후에 할아버지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줄줄이 자식들이 태어납니다.
우리 엄마가 그 막내입니다.
결국 그 아이들을 대학교에 보내 주지는 못했고
의지가 강한 아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 자기 힘으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아직까지 그녀는 많은 한시들을 외우고 있습니다.
치매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벽계수도 아마 자신이 외우고 있는 한문 텍스트에 나온 인물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벽계수가 나오는 꿈을 또 꾸고 싶다고 말했지만
생전에 영감이 정해놓은 묘자리,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이미 누워계시는,
바로 그 영감의 옆자리 말고, 자신이 가고싶은 자리에 묻히고 싶다고 계속 말합니다.


'나 바람이 술술 잘 통하는 여기 갈산재 어디 묻어줘. 이 넓은데 나 하나 갈 곳 없겠어?'

그건 남은 자식들이 결정할 일입니다.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남편 대신 벽계수를 택한 것입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백년을 가는구나.

그녀는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떤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잔잔하고, 조용하고, 살포시 살포시 웅얼웅얼 한시를 읊으면서 말입니다.


저녁무렵, 집에 돌아왔습니다.
'말하는 건축가'를 보았습니다.
말하는 건축가는 내가 올해 본 세번째 영화가 되었습니다.
첫번째 영화는 '건축학개론'이고 두번째 영화는 생텍쥐베리의 생애를 담은 짧은 흑백 기록영화
였습니다.
영화는 나에게 아프게 헤어진 잘난 옛날 남자친구들 같아서
나는 아직도 새로운 연인을 만나지 못해서, 그를 생각만해도 너무 고통스러워져서
영화관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어떤 것이었습니다.

흑백기록 영화를 예외로 한다면,
내가 올해 본 두편의 영화는 모두 건축에 대한 것입니다.
재밌습니다.
건축학개론은 96학번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고
말하는 건축가는 이제는 세상을 떠난 65살의 건축가의 이야기입니다.
말하는 건축가는 건축학개론보다 훨씬 젊어서
심지어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고양이를 부탁해보다 더 젊습니다.

건축학개론을 보았을때, 나는 그 영화를 너무 좋아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건축가를 보았을때
나는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나에게 위로를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위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망의 조금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지나치게 많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느끼기도 해서요.
(하지만 어떤 밤에는 애타가 위로라도 찾아 엉엉 울기도 하지만요.)

이 영화는 말이죠, 내가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 이런 것들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건축학개론을 보았을때와 달리, 감독과 촬영감독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저런 삶을 살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도
내가 저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물론 나는 영화에서 감독 정재은을 보았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나는 예전에 고양이를 부탁해 디비오를 가지고 있었고
몇번 돌려보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년전에 그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과 골방에 틀어박혀 그 영화를 보던 나는
10년 후인 지금 더 젊은 것 같습니다.

나에게도 영화를 한다는 예술행위자체가 구원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이 고통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찬찬히 잘 고찰해볼 것입니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어떤 지나가는 사람이 도시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공간이 도시'인 것 같다고.

나는 내 고민을 풀어줄 힌트 하나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 욕망을 위해서 내 삶을 포기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것이 내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욕망의 실체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욕망이 아닌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내가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 삶이 끝난 후의 무덤 속에서라도 100년을 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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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책했던 들판의 끝에 고택이 있었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의 고택은 한산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살금 살금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습니다.
종부로 보이는 분이 사랑채에서 나오십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사랑채 뒤, 종부가 기거하는 듯한 안채 마당을 가로지르는 정원위 빨랫줄에 널린
다섯개의 하얀 행주가 정갈해보였습니다.
종부는 저에게 신발을 벗고 사랑채로 올라와서 안을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섬돌에다 살금살금 신발을 벗어넣고
조심조심 마루로 올라가서 사랑채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종부가, '사랑채에서 가장 예쁜 공간이 있는데, 내 특별히 보여드리지.'
하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다실이에요. 이집에서 가장 예쁜 곳이지요. 아무한테나 보여주지 않아요. 여름이면 여기 문을 다 열어 놓아요.'
그 다실에는 뭐랄까요, 종부는 예쁘다고 표현하셨지만, 예쁘다기 보다는,
짙은 갈색빛의 오래되고 정갈한 시간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대구 한복판에 있던 수도회의 수녀님이
'여기가 우리가 사는 방이야. 이거 아무한테나 보여주는 거 아니란다.'하고
자신의 방문을 열어 보여주셨을때의 느낌과 같았습니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던 조그만 방이
내 집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런 순간을 기다립니다.
경부 최부잣집에서 시집오셨다는 위엄있는 종부,
또는 아들많은 집의 막내딸이었던 수녀님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시간이 깃든 방의 문을 제게 열어주듯이
나 보다 먼저 이 길을 걸은 누군가가
자신의 삶의 지혜의 문을 열어보여주는 순간을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걸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치 카페 뤼미에르의 요코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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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