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이전의 삶

어린왕자 한국특별전 관람기

혜선, 2012. 9. 10. 02:44






생텍쥐베리는 1900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레옹 베르트를 만난 것은 서른 다섯살 이후이다.

그와 레옹 베르트는 22살의 나이차이가 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누구보다 서로의 영혼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

레옹 베르트에게


이 책을 어떤 어른에게 바치게 된 것을 어린이들이 용서해주었으면 한다.

내게는 그럴 만한 진지한 이유가 있다.

그 어른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니 말이다.

그 밖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 어른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까지도 다 이해할 줄 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이유는, 그 어른이 지금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춥고 배고픈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 어른은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서른 다섯살이 넘은 이후에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친해질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

그의 나이가 나와 얼마나 차이 나는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로부터 가장 소중한 책/이야기를 헌정 받을 수 있고

또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이야기를 그에게 헌정할 수 있다.


삶이라는 것은 참 아름답다.

나는 이럴때 그런 걸 느낀다.




올해 한국 나이로 서른 다섯살이 된 나는

내 또래 친구들과 잘 말이 통하지 않는 편이다.

나보다 열몇살이 아래라면 그래도 좀 통한다.

그러나 나와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은

올해 여섯살이나 일곱살이 된 사람들이다.



이런 친구들은 나를 알아본다.


어제는 친구의 딸 윤아와 만나 함께 종이 인형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종이 인형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윤아를 그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 숱이 너무 많아져 버려서

윤아의 제안으로 오려내게 되었고,

일단 오리기 시작하자

어렸을때 종이 인형놀이를 하던게 생각났다.

그래서 옷을 만들게 되었다.




윤아와 나, 그리고 또 다른 내 친구는 자정까지 같이 인형 옷을 만들었다.

곧 잠이 쏟아져왔고, 우리는 피곤했으나

윤아는 지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인형의 남자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녀의

'남자 친구 만들어 주세요.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요'는

다음날 새벽과 아침 내내 계속 되었다.







결국 나는 줄무늬 티셔츠에 긴 청바지를 입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인형의 남자친구를 만들어주고 나서야

~놓여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아침을 먹고,

윤아의 유치원 근처에 있는 ECC건물 화장실에 같이 다녀온 다음 헤어졌다.



윤아는 이화 유치원에 다니는데, 친구는 언젠가 윤아가 이렇게 말한적 있다고 했다.


"우리 유치원 안에 대학교 있다~"



윤아가 ECC로 달려내려가는 모습, 또 달려 올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매일 대하는 유년의 풍경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곳으로 왔다.

저 보랏빛 새들을 따라.








이 곳에 전시된 <어린왕자> 책 속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그림들과

생텍쥐베리가 어린왕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렸던 드로잉들과

그의 작은 그림들이 곁들여진 편지들을 보며


나는 나에게 가슴아픈 일이 생겨

주말에 불현듯

이제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아졌던 서울에 오게 된 것이 감사했다.

이 전시를 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삶이란

곳곳에 아름다운 우물을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내 가방은 무거웠지만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쉬면서

모든 그림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걸로도 성이 안 차

그 모든 그림이 담긴 도록을 샀다.

그리고 나를 가장 많이 울린(실제로 울지는 않았다.) 그림 몇개는

엽서와 포스터의 형태로 지금 우리집에 붙어있게 되었다.







어린왕자가 여행중에 만났던

어느 별에 살던

허영심이 많은 남자의 원안이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감탄받고 싶어하는

이 사람의 욕구를 드러내고자

화려한 옷, 화려한 구두, 화려한 왕관을 그렸다고 한다.



나는 이 사람이 나 처럼 느껴졌다.

그는 슬펐고, 귀여웠고, 애틋했고, 사랑스러웠다.








나중에, 그는 책에서는 이런 모습으로 그려졌다.









생텍쥐베리의 외투이다.

참 컸다.


조종사로서 그는 많은 비행과 전투에 참여했다.

그가 어린왕자를 썼던 것은 1942년이다.

그는 그로부터 두 해 후인 1944년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프랑스 군의 일원으로 비행하던 중 독일군에 의해 격추당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메모와 편지에는 전쟁을 걱정하는 내용이 많았다 한다.

긴 눈썹을 가진 저 남자그림 아래 글씨는

'어찌나 걱정이 되는지'라는 의미라 했다.



전시장 한쪽에는

오래전에 제작된 18분짜리 기록영화가 상영중이었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두번째로 본 영화가 되었다.


안데스 산맥위를 비행하는 화면,

사막위에 불시착한 화면들 위로,

그대로 따박 따박 받아적고 싶은

삶의 진실들이 쏟아졌다.


내 기억이 허락하는 몇개를 여기에 적어둔다.


"나는 도전했고 실패했다.

나는 받아들인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다."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은 괜찮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살아돌아간다면,

이 필요하면서도 '무의미한'행위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에 결속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닐지라도

불의로 인한 타인의 불행 앞에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가의 문제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참여하고 나누는 것이다."







전시장을 나와, 유리창에 비치는 어린왕자와 여우 사이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시장이나 꽃이 많은 정원에 가면,

특히 주말에는 연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한번씩 잊혀지지 않는 커플이 있다.

로토루아 박물관 입구에 손을 잡고 서 있던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 할머니 커플.

오클랜드 윈터가든을 나서든 어리고 말랐던 소년 게이 커플.


나는 그들 연인들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었다.


오늘 보았던 티셔츠를 맞춰 입고 있던 소년 커플도 그러했다.


그들은 너무나 젊고 진지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늦은 오후가 되어 밖에 나왔을때

나를 가장 많이 울렸던 그 그림과 다시 한번 만난다.






"너희들은 누구니?"

어린 왕자가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 물었다.

"우린 장미꽃이야." 그들이 대답했다.

"아, 그래?"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자신이 몹시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의 꽃은 이 세상에 자기와 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고 늘 그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정원 한 곳에만 똑같은 꽃이 오천 송이나 피어 있는 게 아닌가!



......



'난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꽃을 가진 부자인 줄만 알고 있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가진 꽃은 겨우 평범한 장미 꽃이군.

그리고 기껏 무릎까지 밖에 안 오는 화산 세 개.

그 중 하나는 영영 꺼져버렸는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 가지고 대단한 왕자가 되긴 틀렸어....'


그래서 그는 풀밭이 엎드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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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풍경은 더 쓸쓸해 보였다.

동대문 디자인 프라자의 크고 멋없는 건물들과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스카프를 휘날리며 서 있는 그는.




나는 내 영화가 생각났다.


내 영화는 나의 작은 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장미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그 꽃에 물을 주고 가꾸었던가.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는 너무 평범해'라고 했던가.









나는 장미 꽃 담장 앞에 서 있는 어린 왕자의 눈과 코와 입이 짓고 있는 표정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그와 함께


나의 슬픔을 애도하고 싶었다.








녀석은 게스트하우스 같은 내 방 매트리스 옆으로 왔다.


내가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없을 지는 모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아꼈던 많은 디비디들을 처분했거나 내가 알 수 없는 구석으로 처박아 두었고


지난 8개월간 단 한편의 영화밖에 보지 못했지만(아, 오늘 옛날 기록영화를 하나 보았지. 그러면 2편.)


이사를 오면서도 저 카페 뤼미에르 포스터를 떼어내지 못했다.


저 영화를 처음 보고 난 후의 며칠이 생각난다.


내 일상은 계속 저 영화속에 있었다.


나는 마치 요코가 된 것 같았다.


요코처럼 지하철 계단을 오르 내리고 빨래를 널고 요리를 했다.




나는 아마, 분명히, 저런 영화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저런 영화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책을 찾고,


사람을 만나고, 사람에 대한 글을 쓰고,


소리를 채집하고, 사진을 찍고,


아이가 생기면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16만원짜리 루이뷔통 짝퉁이나 샤넬 짝퉁이나

뭐 이런 사이트를 찾아보는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가방을 살 돈으로 책을 사고 기부를 할 것이다.









어제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 기차가 평택을 지날 때

거대한 버섯같기도한 구름과 그 뒤로 펼쳐지는 불타는 노을을 보았다.

그 구름은 커다란 버섯아래 작은 공룡 몇마리를 데리고 떠가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지.

나는 평택이 건네주는 인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창밖에 코를 박고 있다가 생각해냈어.


그래, 이맘때이지. 초가을은 노을이 아름다울 때야.

일년중 아주 짧은 몇 안되는 나날들.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기분 이상해지게 만드는 날들.


1년전에도 저런 엄청난 노을을 보았지.

한강위의 무슨 대교였지 싶다. 뚝 섬 유원지 근처.

기억하니, 얘들아.

엉망이 되어 징징 거리는 나를 니들이 돌봐 줬잖니.


그 날의 노을, 찾아보니 아직 있다.